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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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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⑲

목천읍 송전리․석천리

1970년대 시민합동결혼식 장면.jpg1970년대 시민합동결혼식 장면.
 
[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송전리(松田里)
송전리는 목천군 읍내면 신대리, 서덕리, 만일동, 산방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소나무가 많아 송전리라고 하였다.
-삼뱅이, 산방(山芳), 잠뱅이, 잠방(蠶房) : 둥구재, 원석천, 송전 일부를 함께 일컫는 지명이다. 세 갈래 길이 있어 방향이 셋이라 삼방이인데, 그것이 변음되어 삼뱅이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세종대왕 때 누에치는 것을 장려하여 이 곳에 잠방(蠶房)이 있었다고 하는데(아직도 나라실 산꼭대기에는 굵은 뽕나무가 많이 있다.) 그 잠방이가 변음되어 잠뱅이가 되었으며, 산이 방처럼 아늑히 모여 있어서 산방인데 삼뱅이로 변음되었다고도 한다.
-임터(林宅) : 이곳에서 임씨가 부자로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집터가 있다.
-개갱주보(犬更主洑) : 옛날에 이 보(洑)의 권한을 개 한 마리와 바꾸었는데, 개로 인하여 보의 주인이 달라졌다고 개갱주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내보(洑) : 진내들에 물을 대는 보를 말한다.
-다람절터 : 월현산(月懸山)에 월현사(月懸寺) 또는 월은사(月隱寺)란 절이 있었다. 달음절이라고도 한다. 멀리서 보면 달에 매달린 것 같아 옛날 중국에서 조선(朝鮮)에는 달에 매달려 붙어 있는 절(寺)이 있다고 하여 구경하러 이곳까지 몰려왔으며, 와 보지 못한 사람은 한번 와서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절터에는 디딜방아터와 우물이 있다. 디딜방아는 깊이 21cm, 폭은 18cm이고, 터는 사방 10보 내외이다. 우물은 깊이가 120cm, 폭이 60cm이고, 축대 높이는 2~3m, 길이는 25m 정도이다.
※청주 곽씨 족보에는 월현사(月懸寺)로, 언양 김씨 족보에는 월은사(月隱寺)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 절터 우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데, 명주실 몇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고 한다.
-물탕바위 : 절터 아래에 넓은 바위굴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항시 물이 똑똑 떨어진다 하여 물탕바위라 한다. 월은사 스님이 이곳에서 개를 잡아먹는 바람에 절이 온통 노래기로 뒤덮여 폐사(廢寺)되었다 한다.
-감투바위 : 물탕바위 아래에 있는데 감투처럼 생겼다. 예전에 여인들이 위하던 바위다. 잘 위하면 아들이 큰 벼슬을 한다고 하였다.
-꽃단지바위 : 나라실 입구에 있는 바위다. 옛날에 미친 여자가 꽃을 엮어서 머리에 이고 앉아 있었던 곳이라 하여 꽃단지바위라고 하였는데,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진달래꽃, 철죽꽃 등 각종 꽃이 바위를 감싸고 있어서 꽃단지바위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귀신바위 : 송전으로 가는 도중 왼쪽에 외로이 누워 있는 작은 바위다. 지금도 달밤에 혼자 걸어가다 보면 꼭 사람이 있는 듯 섬뜩하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
-가마바위 : 동네 뒷산 신대 뒤에 있는 큰 바위다.
-장성거리 : 가옥이 한 줄로 산 밑에 죽 이어져 있어 긴 성처럼 보인다고 하여 장성거리라고 한다.
-주막거리(酒幕距離) : 장성거리에서 구암과 송전마을로 가는 삼거리인데, 옛날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로 과거 보러 가던 사람들이 이 곳 주막에서 쉬었다가 매일골이나 덜미기를 거쳐 성거산을 넘어 입장으로 갔다.
-기와집골(瓦家谷) : 옛날에 큰 부자가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금도 기왓장이 많이 나온다. 송전마을 뒷골을 말한다.
-산제당 : 기와집골 너머에 있다. 예전에 이곳에 있던 산제당(山祭堂)에서 동네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연자방아터 : 송전리 부잣집 김완섭 씨 댁 안뜰에 있다. 지금은 연자매의 밑 부분만 보존되어 있다.
-잠실(蠶室) : 아주 옛날에 누에를 치던 잠실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전화국 사무실 부근이다. 잠뱅이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언양 김씨 묘 : 송전리 뒷산 매봉산에 있다. 이곳에는 언양 김씨 사헌부 감찰 증(贈) 사복시정 정립(挺立)과 감역관 증 승정원 좌승지 절(?)과 문경현감 증 이조판서 남갑(南甲), 그리고 천안군수 규석(奎錫) 등 여러 선대의 묘소가 있다.
-저도럭 : 송전 마을길 건너 저쪽 끝에 있는 도로 옆의 들녘을 말한다.
-뒷동산 : 송전리 뒷산 매봉산을 송전리 사람들은 뒷동산이라고 한다. 언양 김씨의 종산(宗山)이다.
-신대(新代) : 원래는 호주방골에 있던 만일동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는데,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여 산 아래로 이사와 마을을 이루어 이곳을 신대라고 하였다.
-서낭당 : 마을 입구에 있다. 지금도 서낭제를 지내며 잘 보존되어 있다.
-호주방골 : 맬골 위의 고랑으로 호수처럼 넓고 둥글게 생겼다. 예전에 산적이 살았다고 한다.
-새말림 : 산을 보는 사람이 새로 바뀌어 새 말림이라고 한다.
-한뺌이골 : 땅이 한 뼘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골인데, 일설에 의하면 왕이 하룻밤을 자고 밥을 먹고 갔다는 설로 한밤이가 즉 일야미(一夜味)라 하는데 근처에 유왕골, 위례성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밤이가 변음되어 한뺌이가 되었다는 설로서 설득력이 있고, 전국의 명당이라 한다.
-부자마을 : 맬골 위에 있는데 옛날에 부자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에펀더기 : 맬골 뒤에 있는 펀던(펀더기)으로 햇볕이 잘 들어 아이들이 이곳에서 놀았다고 한다.
-가이방골 : 맬골 가에 있는 골이다.
-진주산 : 맬골 앞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진주처럼 둥글다고 하여 진주산이라고 한다. 고려 때 왕건이 유왕골에서 유숙할 때에 이곳에서부터 졸아지(도라지)고개까지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설도 있고, 동학(東學) 때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올라 망을 보았다는 설도 있다.
-안산 무당바위 : 맬골 앞산에 있는 무당이 위하던 바위다.
-평(병)풍바위 : 맬골 뒤에 있는데 바위가 평(병)풍처럼 생겼다.
-다람절산 : 맬골 앞산을 말한다. 옛날에 이곳에 월은사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안산 : 맬골 앞산을 안산이라고 한다.
-장자바윗골 : 옛날에 이 바위를 위하면 큰 부자가 된다 하여 동네 사람들이 위하던 바위다.
-뒷동산 : 맬골 뒷산을 말한다.
-선바위 : 맬골 앞산에 있는 바위다. 사람이 서 있는 모습처럼 생겨서 선바위라고 한다.
-유왕골고개 : 맬골에서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맬골고개 : 이곳을 넘으면 만일사를 거쳐 천흥으로 갈 수 있다.
-빈들바위 : 만일사로 가는 도중에 있는 편편한 바위다. 맨질맨질하여 빈들바위라고 한다.
-걸미골 : 신대에서 성거 문암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다.
-낭떠러지기 : 신대에서 만일사로 가는 도중에 열 길도 넘는 낭떠러지가 있다.
-달바위 : 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달바위라고 한다.
-작살골 : 맬골 뒤 순 돌로 된 산으로, 자갈이 많아서 자갈산 또는 작살골이라고 한다. 이곳을 넘으면 서덕골이다.
-계성군 묘(桂城君墓) : 성종 대왕의 셋째 아들인 계성군 이순(桂城君 李恂)의 묘소와 성종 대왕의 여덟 번째 부인 숙의 남원하씨(淑儀 南原下氏 : 계성군의 어머니)의 묘소가 맬골 고개 위에 있다. 1971년 5월 27일 서울 신림동 서울대학교 뒷산에서 이장해 왔다.
-깃대봉 : 일제때 비행기 항로를 안내하는 기를 달았던 곳이다.
-양지(陽地)말 : 햇볕이 종일 들어서 양지말이라고 한다.
-방앗간 : 양지말에 있는 방앗간을 말한다.
-구터 : 방앗간이 있는 동네인데 오래된 동네여서 구(舊)터라고 한다.
-논바위 : 양지말 위 논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로, 열 명 정도 앉아서 놀 수 있다.
-평(병)풍바위 : 양지말 앞산에 있는 바위로 병(평)풍처럼 생겼다. 이곳에다 지성을 드리면 가정이 평안하고 아들을 낳는다 한다.
-매봉산 : 양지말 앞산이자 송전 뒷산으로, 매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매봉산이라고 한다.
-홈거리 : 먹뱅이에서 내려오는 물을 대기 위해 나무로 홈을 파서 수로를 만들었는데 굉장히 오래된 것이다. 홍거리라고도 한다.
-진설미들 : 이곳에서 나오는 곡물로 제를 올리는데 인분을 주어서도 안 되고, 농사를 지으면서 욕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하천을 중심으로 잿들과 마주하고 있다. 진설미들은 송전리에 속하고 잿들은 석천리에 속한다.
-삼인봉(三人峰) : 산의 생김새가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한다. 동학(東學) 때 세 사람이 이 산에 올라 직산, 목천, 안성(북면 쪽)방향을 각각 맡아 관군이 오는 것을 살피던 곳이다. 목천 쪽에서 관군이 오면 직산 쪽으로 숨고, 직산 쪽에서 관군이 오면 안성 쪽으로 숨고, 안성 쪽에서 관군이 오면 목천 쪽으로 숨었다고 한다.
-광덩어리(廣谷) : 논과 밭이 함께 있어서 광덩어리라고 한다.
-갓골 : 골의 생김새가 갓처럼 생겼다고 한다. 먹방리 가에 있다.
-터골 : 먹방리 아래에 있다. 옛날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축대가 남아 있다.
-농바위 : 맬골과 먹방리 중간에 있으며 바위가 농같이 네모나고 크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 속에는 대한민국을 다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보물이 들어 있다고 하며 큰 장수만이 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나라가 아주 위급할 때에 보물을 사용하라고 했다고 한다. 욕심 많은 농부가 이 문을 열려고 정으로 쪼다가 벼락 맞아 죽었다고 한다.
-뒷골 : 동네 뒤에 있는 골을 뒷골이라고 한다.
 
▲석천리(石川里)
석천리는 목천군 읍내면 사기점리, 먹방이, 산방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냇물이 돌 사이로 맑게 흘러내려 간다고 하여 석천(石川)이라 하였다.
-원석천리 : 석천리에 예전부터 있던 마을로 가장 오래된 마을이어 원석천리라고 한다.
-감리교회 : 목천에서 최초로 생긴 교회로 흙벽돌로 지었는데 60년대에 장마로 무너졌다. 그 후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으며 신도 수는 30여명 정도 된다.
-산리봉(山離峰) : 산봉우리가 따로 떨어져 있어서 산리봉이라고 한다.
-개미골 : 산의 형태가 개미와 같다 하여 개미골이라고 한다.
-느티나무 : 동네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약 500년쯤 되었으며, 시(市)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경치가 좋아서 동네 주민들이 휴식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큰덕골 : 큰 언덕이 있어서 큰덕골이라고 한다.
-작은덕골 : 작은 언덕이 있어서 작은덕골이라고 한다.
-잿들 : 이곳에서 나는 곡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양지말의 진설미들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나라실, 국태봉(國室, 國太峯) : 나라실 또는 국태봉이라하는 이곳은 나라를 구할 수 있는 큰 명당에서 임금이 난다하여 신성시 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산의 혈을 끊어서 그 효력이 없어졌다고 한다. 일제 말에 쇳물고개 부분을 사람을 동원하여 끊었다. 나라실 산 꼭대기에 올라서면 나라만큼 넓은 평지가 있다. 일본인들이 나리실로 변음한 것이다.
-나라실 절터 : 나라실 중간쯤에 절터가 있다. 지금도 기와조각을 수습할 수가 있다. 70년 초까지 기와를 주워다가 깨어 갈아서 놋그릇을 닦았다고 한다.
-병신고개 : 나라실 위에서 상가마골을 넘어 다니던 고개인데 갑자기 뚝 떨어져 병신고개라 부른다.
-상가마골 : 옥추개울에서 산을 하나 넘으면 나타나는 넓은 들녘이다. 임금이 태어나 가마 타고 행차하는 형상의 명당이 있다 하여 지금도 지관들이 찾아다닌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와룡산(臥龍山)과 소금재의 중간인 나라실에서 상역골로 넘어가는 쇳물고개 부분의 혈을 끊어서 그 효력이 없어졌다 한다.
-옥적동(玉笛洞) : 상가마골에서 송전리 구암 옆으로 내려오는 개울이 있는데, 계곡이 맑고 물 흐르는 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소리여서 옥적동이라 하며 옥추개울이라고도 한다.
-가마바위 : 구암 뒤 옥추개울 위에 있다.
-소금재(표대봉) : 일설에 요순임금이 정치를 끝내고 거문고를 켜던 곳이라 소금재(素琴宰)라 부른다고 한다. 목천읍 석천리와 서흥리, 북면 전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아주 옛날 이곳에서 소금을 캤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이 산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쇠를 박았다고도 한다. 국토 측량의 기본이 되는 표석(表石)도 세웠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전국 각처에 쇠말뚝을 박았고 지금도 각처에서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아주 예전에 이곳이 바다였을 당시 소금을 많이 실은 배가 이곳을 지나다 침몰되었다고도 하며, 또 일설에는 소금배가 이 산을 기준으로 하여 지나다녔다고도 한다.
-쇳물고개 : 나라실에서 상역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인데, 예전에 소금재에서 쇠를 캐어 이곳에서 녹여 물건을 만들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성주도씨 묘 : 석천리 뒤에 있는데 자헌대부 동지 중추부사 상(翔)과 가선대부 용량위부호군 순업(順業)의 묘가 이곳에 있다.
-새터 : 구터에 살던 사람들이 새로 이사 와 살던 곳으로 방앗간 앞 동네이다.
-산 배따라기 : 양지마을 앞산으로 비탈이 심한 곳에 따비를 떠 밭을 일군 곳을 말한다.
-텃골 : 동네 뒤로 사람이 살던 터가 있다.
-홍골산 : 양지마을 뒷산으로 흙이 붉어서 홍골산이라고 하고, 앞뜰에 물을 대는 곳을 홈 거리라고 한다.
-노적봉산 : 산의 생김새가 볏섬을 쌓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
-언양 김씨 묘 : 아버지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상(喪)옷을 입은 채로 묘소 앞에서 죽은 효자 남수(南粹)공과 통정대부 지국(持國)과 통덕랑 지항(持恒)의 묘소가 있다. 양지마을 뒷산으로 언양 김씨 종산(宗山)이다.
-먹방리(먹뱅이 묵방리) : 성거산 밑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다고 한다.
-성거산(聖居山) : 목천읍, 성거읍, 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79.1m이다. 고려 태조가 직산현(稷山縣) 수헐원에서 이 산을 바라보니 산꼭대기에 오색 구름이 엉켜 있어 신령이 있다 하여 제사를 지내고 성거산이라 하였으며, 그 후 조선 이 태조와 세종대왕이 온양온천에 갈 때도 또한 이곳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인봉 : 아주 예전에 언양 김씨의 충신인 김응상이 육진에서 싸우다 전사한 공으로 사패지기를 받을 때 세 사람이 올라 경계를 정하던 곳이라 전하며, 오른쪽 눈을 가리고 남쪽을 바라보아서 보이는 것 모두를, 북쪽으로 보아 보이는 곳 모두를 하사했는데 성거산을 중심으로 남쪽은 목천면 서흥리까지 북쪽은 성거읍 천흥리까지라 한다. 언양 김씨 문중에 구전하는 이야기이다.
-고린장[고려장(高麗葬)]골 : 중간 먹방이 맞은편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에다 고린장(고려장)을 했다고 하며, 70년대 초반에 도굴범들이 도굴하여 도자기와 접시, 수저 등을 도굴해 갔다고 한다.
-광골[廣谷] : 먹방이 중간의 넓은 골을 말하는데 골이 넓고 깊다.
-두리봉(斗利峰) : 산봉우리가 쌀을 되는 모말처럼 생겼다.
-서덕골(西德谷) : 천주교인을 탄압하던 병인박해(1866년)때 패롱권 신부와 뮈델 신부, 두세 신부, 베르모델 신부 등 프랑스 신부들이 이곳에 숨어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이곳은 직산, 목천, 북면의 경계로 숨어서 활동하기에 용이하였고, 경상도, 전라도, 내포 교인들과 연락도 하였다. 결국 중국 천진(天津)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일부는 잡혀서 처형되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산을 넘으면 북면인데, 그곳에 천주교인들의 무덤인 성지(聖地)가 있다. 예전에 7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집터와 감나무만 남아 있다.
-굴개미뚝 : 둑에 개미가 많아서 굴개미뚝이라고도 한다.
-진밭 : 양지마을 위에 밭이 길을 따라서 길게 붙어 있다.
-성적굴암 : 동학 때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최베드로(천여 文錫), 최라자로(종여 嘉錫), 배문호. 고요셉(최베드로 며느리) 등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잡혀 공주 감형에서 처형되었다. 동네에서는 방아굴이라고 부른다.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절구를 굴속에 들여놓고 방아를 찧으며 목회 활동을 하면서 은신하던 곳이라 전해 온다.
-대문바위 : 성거산 정상에 있는데 바위 표면에는 직사각형의 문짝형의 홈이 파여 있다. 이 안에는 혼자 3년 이상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고 하여 전국의 석수쟁들이 찾아와 이 문짝을 정으로 쪼으려고 하면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고 천둥 번개가 쳐 실패하곤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땀봉 : 중간 먹방이 뒤에 있는 산을 말한다. 바늘구멍처럼 좁다.
-제비바위(燕岩) : 성거산 밑 먹방리 뒤에 있는데 제비가 앉아 있는 모습과 같아서 제비바위라고 한다. 혹자는 이곳이 제비 혈의 명당이라고도 한다. 이 바위 밑은 나무를 10짐이나 들여쌓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천주교인들이 기도를 하고 은신하던 곳이라 한다. 해방 후에도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와서 기도를 했다고 전해 온다.
-한배미골 : ☞ 땅이 한 뼘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골이라 한배미골 이라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왕(王)이 하루밤을 자고 밥을 먹고 갔다는 설로 한밤이 즉 일야미(一夜味)라 하는데 근처에 유왕골, 위례성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밤이가 변음 되어 한뱀미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전국의 명당이라 한다.
-수돌배미 : 중간 먹뱅이 뒤에 있는 골인데, 이 고을에서 물이 처음 나는 논이라 수돌배미라고 한다.
-씨앗골 : 옛날에 이곳에 굴이 있었는데 그 곳에 씨앗을 저장했다고 한다. 제비바위라고도 한다.
-언양 김씨 묘 : 언양 김씨 종산(宗山)인데, 이곳에는 문학사 치진(致晉) 여석(汝錫)과 홍주목사 동연(東淵)과 효자 동몽교관 의연(義淵), 통덕랑 민채(敏采) 서채의 묘소가 있다. 큰 산소라고도 부른다.
-굴바위골 : 성거산 꼭대기에 큰 바위가 있는데 날씨가 음산하면 이상한 소리가 울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무하는 것을 꺼렸다.
-덜매기(신석천 新石川) : 원석천 뒤에 있으므로 덜매기라 하고, 신석천과 원석천 사이의 고개가 완만하여 고갯목이 덜 되었으므로 덜목이기라고도 하며, 사기점이라고도 한다.
-각골(角谷) : 소의 뿔처럼 뾰족하여 각골이라 한다.
-도촌재 : 북면 도촌으로 가는 고개인데 지금은 차가 갈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설했다.
-큰골 : 고롱골이라고도 하는데 덜미기 뒷산의 큰골을 말한다. 이곳을 넘으면 북면이다.
-작은골 : 큰골 옆의 작은 골짜기다.
사기점 : 덜미기 앞 동네를 말하는데 이곳에서 중품(中品) 그릇을 만들었다고 한다.
-농천 : 사기점 뒤 먹뱅이로 넘어 다니던 곳이다. 농사가 유난히 잘 되었다고 한다.
-명덕골 : 이곳을 넘으면 북면 명덕리로 갈 수 있다.
-사고시고개 : 이곳을 넘으면 북면 사고시로 갈 수 있다.
-논골 : 산 속에 논이 있어서 논골이라고 한다.
-뒷산 : 동네 뒷산을 말한다.
-골밭골 : 골 사이에 밭이 있어서 골밭골이라고 한다.
-용바위 : 바위 생김새가 용처럼 생겼다고 한다.
-고롱골 : 큰산을 넘으면 북면인데 고릉(高陵)이 변음되어 고롱이라고 한다.
-삼생이 : 천신, 지신, 용왕신(天神, 地神, 龍王神)을 위하면 죽음을 세 번 면할 수 있다 하여 동네 사람이 위하던 곳이다.
-승적골 : 성적골이라고도 한다. 아주 예전에 싸워서 이긴 곳이라는 전설만이 구전된다. 산 너머에 위례성이 있는데 온조왕이 백제의 터전을 잡은 곳이다. 아마도 백제군, 고구려군이 싸운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떤 촌로(村老)들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죽인 곳이라고 말한다.
-샘너머 : 이 골짜기에는 현재 집 한채가 있는데, 그 집 앞마당에 샘이 있어 샘너머라고 부른다.
-동구재 : 이 곳에는 옛날에 일곱 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세 집만 남아 있고 한 집은 빈 집이다.
-구암 :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동네 이름을 구암(龜巖)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에는 이 바위를 동네 사람들이 위하였다고 한다. 현재 다섯 집이 살고 있다.
-구암샘 : 구암 동네 앞에 샘이 하나 있는데 옛날에는 이 샘물의 맛이 좋아 동네 사람들 모두가 먹고 살았다. 그리고 샘물이 아주 차가워서 여름에는 동네 사람들이 냉장고 대용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이 샘을 매우 위하였으나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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