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평을 여는 에세이③] 최현아 ‘연필’

기사입력 2024.04.22 14:30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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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곤 (문학평론가/수필가/시인)

    [천안신문] 샤프 연필은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끊어지니 성질 급한 나의 화를 돋우는 데 충분하다. 그런 이유로 나무를 깎아내고 커터칼로 연필심을 날카롭게 만들어 사용한다.

     

    십몇 년간 연필을 깎다 보니, 비유하자면 그 속도는 KTX급은 될 것 같다. 이런 내 모습을 아이들은 신기하게 쳐다본다. 

     

    “와! 선생님! 연필 너무 잘 깎으세요. 그런데, 왜 연필깎이를 사용 안 하세요? 저도 해보고 싶어요!” 누가 보면 심혈을 기울여 목공예나 조각 예술 행위를 하는 줄로 착각할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이상만 되면 샤프펜슬을 찾는다. “봐봐. 그러니까 내가 연필을 사용하라고 했잖아. 영어도 못 하면서 똥고집을 부리고 그래.” 오랫동안 나와 함께 공부하다 보니 아이들은 내 성격을 닮나 보다. 아이들은 쉽게 승복하지 않고,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와서 공부하죠. 잘하면 뭐 하러 학원에 다녀요? 차라리 집에서 독학하지….”

     

    연필은 인간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연필 모양, 색깔,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샤프 연필에서 샤프는 ‘날카로움’을 뜻한다. 샤프 연필을 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쉽게 일을 저지르고, 포기하고, 후회하는 젊은 날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연필심은 중년의 나이 같고, 미술 시간에 사용하는 B급 이상의 연필심은 세상의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겪은 노년의 지혜처럼 느껴진다.

     

    연필처럼 인생도 쉽게 쓰고 지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인간은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 감상평

     

    사르트르는 주장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연필(실존)은 글을 쓰기 위한 목적(본질)이 먼저 있은 후에 만들어진 사물이므로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채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본질을 선택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가 역설했듯 "인간은 자유로워지도록 저주받은 존재"에 처한다. 하얀 노트 위에 살아 있는 연필이라 해도 되겠다. 

     

    어떤 설계도를 그리며 어떤 삶을 써내려가느냐는 전적으로 자유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자. "모양, 색깔, 가격"이 천차만별인 인간의 삶인데, 그 얼마나 한결같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지를 최현아 수필가는 목격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존재'라는 자기기만에 취해 있도록 견고히 장치해 두고 있다. 심이 부러지는 연필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볼펜으로 문제지를 풀려는 초등학생을 보자. 

     

     

    그는 자유롭게 편리함을 선택한 것 같지만 결국은 틀린 답을 고칠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볼펜을 선택할 것이다. 자신의 순수 의지로 선택했을까. 실상은 자본주의가 달콤하게 속삭이는 편리함에 조종받고 있다는 사실을 작가가 환기시킨다.

     

    이처럼 최현아 수필가는 인간의 삶과 연필을 연계지어 자유가 저주가 되지 않도록 "이 세상에 태어나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인간은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뼈있는 지혜를, 부러지지 않는 연필로 써내려갈 줄 아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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