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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년 전통의 '홍성 덕명초'...역사 속으로[천안신문]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가장 오래된 104년 전통의 덕명초등학교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덕명초는 인근에 2014년 개교한 광천초등학교와 통폐합됐다. 100여 년 전통의 명문 초교가 문을 연지 5년밖에 안된 신설 학교로 흡수 통합되는 굴욕을 당했다. 덕명초교는 1908년 덕명의숙(학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사립학교가 효시다. 당시 광천지역의 선각자 서승태 선생이 주도해서 근대교육 수용과 민족의식 자각을 위해 설립했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1911년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사립학교를 폐교시키거나 인수해 공립보통학교로 초등교육체제를 개편한다. 덕명학교도 이에 따라 사립학교 체제를 마감하고 1915년 11월 3일 광천공립보통학교(4년제)로 인가를 받아 새 출발했다. 광천공립보통학교는 1938년 4월 1일 광천 신진공립심상소학교, 해방 후 1946년 9월 1일 광천제1공립학교가 되었다가 1949년 덕명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서승태 선생이 최초로 설립했던 사립학교의 이름을 되찾아 온 것이다. 그러다가 1996년 3월부터 덕명초등학교가 되었다. 2019년 1월 10일 덕명초교는 마지막 졸업식을 했다. 그날 제103회 졸업식에서 23명의 졸업생을 내보내고 남은 재학생 60명은 광천초교로 편입시켰다. 덕명초교 병설유치원도 제24회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덕명초교는 지난 100여 년 동안 1만5000여 명의 동문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충남도지사를 지낸 이완구 전 국무총리, 지난해 별세한 장석환 전 국회의원, 최건환 경주월드리조트 사장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중앙과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동문들이 많다. 그만큼 동문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학교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015년에 이 학교 동문들은 개교 100주년을 맞아 성대하게 잔치한 적도 있다 지금도 쓸쓸하게 비어 있는 덕명초교 운동장 한 모퉁이에는 그때 동문들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덕명초등학교 개교100주년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웅장하게 세운 3m 높이의 ‘번영의 탑’은 그 후 채 5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이름값도 하지 못한 채 쓸쓸한 교정을 지키고 있다. 지난 5일 점심시간 무렵 기자가 우연히 방문한 덕명초등학교는 너무나 조용했다. 새 학기를 맞아 떠들썩해야 할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교문의 학교 명패는 떼어갔을 뿐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직도 개학하지 않은 학교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트럭이 여러 대 드나들면서 본관과 별관 사이 앞 운동장 한쪽에 공사가 벌어진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보니 학생들이 사용하던 각종 교구재가 밖에 쌓여 있고, 인부들이 그것을 분류하거나 계속 안에서 뜯어와 밖에 부리고 있었다. 멜로디언, 아코디언 등의 악기와 지구본을 비롯한 각종 과학기자재 등 멀쩡해 보이는 물건도 많았다. 그러나 학교를 철수하면서 쓸 만한 것은 다 가져가고 남은 물건은 오래 돼 버리고 간 것이라고 했다. 이웃에 있는 광천초교는 광동초교, 광남초교, 대평초교를 통폐합하면서 옛 광동초교를 허물고 초현대식 교사로 새로 지어 2014년 개교를 했기 때문에 학교의 모든 시설과 교육환경이 뛰어나다. 그래서 덕명초교 학부모들은 오랜 전통과 역사보다는 최신 시설의 교육환경을 원하며 신설학교와의 통폐합을 추진해 뜻을 이뤘다. 광천읍지역 근대교육의 산실이었고, 상징이었던 덕명초교의 폐교는 동문들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 주는 허탈감도 크다. 지역경제 쇠퇴와 함께 저출산으로 인해 입학생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인 데다 오랜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낙후된 교육환경 때문이어서 동문들은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다. 홍성교육지원청에서는 덕명초교 활용방안을 놓고 TF팀을 구성해 3차 협의회까지 하며 연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최봉현 주무관은 “홍성군청과 협의해 군내 학교 학생들을 위한 안전체험관이나 그 밖에 교육목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며 “가급적 학교의 형태를 현재대로 보존하면서 유지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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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㊾ – 콜롬비아 ‘산츠 베르날 마리아’[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나는 한국에 오려고 했을 때 고민이 많았다. 그 중에 한국에 있는 친한 친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때의 나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용기와 각오를 모았고 이민을 오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유학 생활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인간관계의 가치에 대해 배우고 있다. 고향에서 멀리 있는 곳에 살면서 휴일과 특별한 날은 가장 외로운 날이라는 사실은 대부분 이민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한테도 그렇게 느껴졌다. 콜롬비아는 추석이 없지만 지난해 추석 때 한국 사람들이 다 고향에 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깝고 가족이 더 많이 그리웠다. 추석 며칠 전에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로부터 갑자기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유학을 했을 때 추석과 크리스마스때 혼자 보내게 되서 너무 슬프고 외로운 기억 아직 남았어. 그래서 요즘은 너의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데 나랑 같이 추석을 보내는 게 어떨까?”...나한테 그 말은 지금까지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해서 추석은 친구와 친구의 가족이랑 시간을 보내면서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날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친구 어머니께 어떻게 부르면 되냐고 여쭤보니 '엄마'라고 부르면 된다고 하셨다. 8개월 동안 엄마를 직접 못 만난 나에게 그 친구 엄마로부터 엄마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요리한 밥을 먹는 게 눈물 난 만큼 인상적이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외로운 것보다 더 걱정되는 일이 있다. 그 걱정은 바로 입원하는 것인데 얼마 전에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그때 친구랑 어떻게 병원에 같이 가게 되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 어려운 시간을 같이 있으면서 조금 더 ‘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기다리면서 우리 학교 간호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병원에 가기 전에 보건실에 갔는데 간호사가 어떻게 됐는지 걱정이 되서 직접 우리에게 연락을 준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간호사가 퇴근하자마자 병원에 같이 있어 주었고 밤늦은 시간 친구의 수술이 다 끝날 때까지 우리 옆에 있어 주셨다. 간호사 덕분에 그 낯설 병원의 경험이 덜 무서워졌다. 우리랑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간호사님의 큰 고생덕에 우리한테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간호사가 항상 우리 옆에 있지 못하는 탓에 친구가 회복하는 동안 우리끼리 친구를 보호했는데 아픈 사람은 어떻게 보호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와 같은 존재없이 우리는 아주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환자가 아픔 없이 편하게 있고, 더 빨리 성공적인 회복을 할 수 있는지 몰랐다. 다행히 옆 침대 환자의 간병인이 우리를 계속 가르치며 도움을 주고 걱정을 해줬다.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에 식사하는걸 잊고있을 때 “아가씨들, 얼른 식사하러 가세요. 저는 환자 밥이 오면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과일도 건네주셨다. 같은 방에 계신 환자들이 다 우리 잘 지켜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한국에 오기 전에 외로울까 큰 고민이었지만 이제는 한국사람의 진지한 마음을 느껴서 그 고민이 조금이나마 없어졌다. 1개월 동안 도와준 사람한테 배운 것은 고향에 살면서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고향의 반대편 나라에 살면서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소중한 경험을 많이 얻어서 한국인의 사심 없는 마음과 ‘정’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은 미래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과 더 깊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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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㊽ – 일본 ‘이치타니 이야나’[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나에게 한국은 좋은 나라이지만 나의 고국인 일본에서 볼 때는 서로를 밀어내는 나침반 같은 나라였다. 안 보이는 벽이 있는 느낌의 나라 한국이었다. 어느날 나는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한국어를 공부하면 할 수록 새로운 단어가 서로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한글의 신기함과 재미를 느꼈다. 그래서 8개월 전에 한국에 왔다.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다보니 선생님께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가르쳐 주셔서 일본에서 배울 수 없었던 표현을 배우고 여러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지난해 10월에 우리는 민속촌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한국드라마에서만 본 적 있는 꿈같은 곳에 들어갔다. 한국의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민속촌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다. 옛날 건물의 아늑한 분위기에서 펑화를 느꼈다. 옛날 한국은 가난했다고 들었지만 그만큼 서로 도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 같아서 새삼 한국은 좋은 나라라고 느꼈다. 그런 나라에서 공부하는 나는 정말 행복하다. 또한 전통적인 예술공연도 봤는데 말을 잃을 만큼 대단했다. 줄타기, 사물놀이, 말 연기하는 사람의 용기나 여러 악기의 조화, 말과의 소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관객을 기쁘게 하려는 한국 사람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고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할 수 있을지 조마조마해서 보는 내내 손에서 땀이 났다. 전통적인 예술공연을 보면서 ‘왜 아직까지 이렇게 좋은 문화를 몰랐을까?’생각했다. 이렇게 나의 나라를 넘어서 다른 나라에 와보면 진심으로 그 나라의 좋은 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 와서 많은 한국문화를 알게 되었다. 이번의 체험을 통해서 한국이 지금까지보다 더 좋아졌고 한국이란 나라가 더 가까워졌다. 온세계 사람들이 이런 좋은 문화를 알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이 마음까지 가까워지면 좋겠다. 아직은 가깝지만 먼 나라라는 소리를 듣지만 나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를 좋아하고 두 나라 모두 좋은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안 보이는 벽이 깨지면 좋겠다. 나는 일본사람으로서 한국에 와서 진심으로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한국문화를 배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먼저 나부터 한국의 좋은 점을 알고 일본과 한국의 마음까지 기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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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㊼ – 이탈리아 ‘클라우디아 소두’[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4년 전 여름, 한국에 처음으로 오게 됐다. 그 여름에 대해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무더움의 열기, 산의 생생한 색깔, 혀끝에 박혀 있는 어려운 한국말, 또한 멜론 같은 단 한국 사람들의 정이 생각이 난다. 사실, 받았던 강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그 첫 한국 여행은 고작 2주일 뿐이었다. 한국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친구 집의 길을 찾았다.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이 다 돼서 말하기 실력이 아직 부족했던 나는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공항 밖에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영어를 못해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아울러 무모한 운전을 해서 정말 무서웠다. 한술 더 떠서 주소가 틀려서 찾기 어려왔다. 그래서 시간이 더욱 더 많이 걸렸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런 시작은 벌써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친구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는데 한국의 첫인상은 무섭고 불안했다. 게다가 친구의 어머니도 한국어만 할 수 있어서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었다. 매일 매일 아이처럼 서툴러서 친구가 없으면 한국말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져 가장 쉬운 문장조차 말할 수 없었다. 날씨도 엄청 무덥고 짜증이 나서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내 기분을 눈치 채시고 같이 등산하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그 때 내 친구는 아르바이트 탓에 너무 피곤해서 못 일어나서 어머님과 단둘이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족한 한국어 실력 탓에 긴장하기 그지없었다. 산길은 너무 길고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무려 3시간 동안 산에 올라가니 갑자기 아름다운 경치가 나타났다. 나뭇잎의 녹색, 하늘의 파란색, 햇살의 눈부신 하얀색, 꽃의 노란색 등이 아직도 내 눈에 생생하게 선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무덥기 그지없어서 친구 어머님은 멜론을 드셨다. 사실 나는 멜론이 입에 안 맞는다. 그렇지만 더위를 타는 나를 생각해 친절을 베풀어 주셔서 그 멜론을 다 먹어버렸다. 멜론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긴장감이 없어졌다. 친구 어머님은 간단한 한국어로만 말씀하시는 노력을 해 주셔서 나도 간단한 한국어로만 대답했다. 또한 나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한국어를 말할 때 실수를 많이 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의 첫인상은 무섭고 불안했지만 그날 먹었던 멜론처럼 달고 내 어머니의 말처럼 따뜻한 친구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막혔던 가슴이 트였다. 만약 그 무덥던 날 친구 어머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한국어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에 살지 않았을 것이다. 4년이 됐는데 친구 어머님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어머니가 항상 내 안부를 묻는다고 들었다. 기회가 생기면 다시 찾아뵙고 나의 한국어 실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드리고 싶다. 첫인상은 물론 중요하기 그지없지만 해외에서 살기 위해 첫인상만 믿지 않고 새롭운 인상을 찾아야 한다. 한국의 긍정적인 인상을 받게 된 나는 지금도 친구 어머님께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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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구대국 중국도 고민하는 저 출산율[천안신문] 중국도 노인인구가 빠르고 늘고 있는데 비해 갈수록 출산율 저하로 정부가 큰 고민에 빠졌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 아시아판 최근호가 중국의 출산율 문제에 대해 보도한 기사를 천안신문이 발췌 요약해서 소개해 본다. ■2016년 8%, 2017년 3.5%로 인구증가율 하락 지난 1월말 중국사회과학학회가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2050년 중국은 65세 이상 노인이 3억3000명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인구가 2029년 14억4000만으로 정점을 찍은 후 거침없이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2065년에 1990년대 중반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인구가 지금보다 더 줄어들면 내수도 그만큼 더 감소하기 때문에 결국 경제도 급격하게 침체에 빠지게 된다. 중국이 노령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비해 젊은층의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짐으로써 불균형적인 사회구조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문제를 초래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면 한 자녀 갖기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정부는 1980년에 배 고픈 식구 입을 줄일 수 있도록 ‘한 자녀 갖기 정책’을 도입했다. 결국 이러한 정책이 나중에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자 2016년 정부는 뒤늦게 2명의 자녀를 갖도록 출산정책을 완화했다. 그러나 썩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2016년 8%였던 중국의 인구 증가율이 이듬해 2017년에는 3.5%로 떨어졌다. 그 원인은 중국도 ‘중류층 소득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말로 분석되고 있다. 즉, 개발도상국 경제가 침체를 겪으면서 소득은 중류층 수준으로 올랐지만 자녀는 덜 갖겠다는 풍조가 만연한 것이다. 서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의 많은 여성들도 사회경제적 활동과 함께 안정적인 가정생활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아이를 기르는데 필요한 보육비와 교육비는 턱없이 오르고 있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이제 개발도상국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보편적인 생활패턴으로 자리잡았다. 한국도 지난해 경제 성장률 둔화로 여성 1명당 출산율이 0.95명으로 떨어졌다. 인구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출산율은 2.1명이라고 한다. 일본은 현재 인구가 1억2700만이나 2100년에는 8300만으로 감소하고, 인구의 3분의 1이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할 것이라는 게 UN의 보고서가 밝힌 전망이다. 이미 일본은 기저귀 판매량이 아기용보다 성인용이 더 많이 팔리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에서는 연금 혜택을 받는 노인이 얼마 되지 않아 노후생활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녀들의 몫이 되었다. 베이징대학교가 2013년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가 민간연금에 가입했고, 0.2%가 사기업직장연금 가입자라고 했다. 그래서 노인 케어를 위한 비용은 가족과 국가가 분담해야 한다. 다음세대의 노동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책임을 떠 맡기는 셈이다. 서구 국가들처럼 훨씬 적은 수의 젊은이들이 세금을 내어 노인세대들을 부양해야 할 처지다. 중국 정부는 증가하는 노령인구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출산 장려로 U턴을 시도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아예 노골적으로 “국가를 위해 자녀를 갖자”며 젊은 부부들에게 선전을 해도 여성들은 사회경제적 활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지난해 8월 난징대학교 교수 두 사람이 2명 미만의 자녀를 가진 사람에게 줄 출산장려금을 더 많은 가족을 가진 가정에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가 SNS를 통해 엄청난 욕을 먹었다. 중국에서 자녀는 대부분 인민들에게 정년은퇴 후 패키지 상품이나 다름없다. 닭이 낳는 계란이 노부모를 위한 끼니가 되듯 말이다. ■노인인구 급성장 4-2-1 역피라미드형 인구구조 3살짜리 딸을 하나 키우고 있는 여성 마잉(30)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 남편이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데 딸 상티야니가 1년 8개월 될 때부터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상티야니는 주중에 매일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유치원에서 보내고 주말에는 베이징시내 대형 쇼핑몰에 가서 수영, 미술, 음악, 영어를 배운다. 이들 부모가 딸에게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약 2만2000달러(한화 2200만 원)다. 마잉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내 딸이 나중에 커서 우리를 부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의 한 자녀 갖기 정책은 결국 한 사람에게 더 많은 가족의 부양을 떠맡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젊은 사람 하나가 4명의 조부모(외조부모 포함)와 2명의 부모를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생길 자녀까지 엄청난 짐을 지우게 된 것이다. 상하이 시는 최근 요양원에 부모가 있다면 자녀에게 방문하도록 의무화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중국에서 ‘4-2-1’으로 알려진 역피라미드형 인구구조는 젊은이들에게 지레 겁을 먹이며 아이 갖는 것을 더 기피하게 만들 뿐이다. 부모로서 자녀를 결혼시키는 일이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중산공원에서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결혼 중매시장이 열린다. 수많은 부모들이 미혼 자녀를 소개하는 포스터를 갖고 나와 학업성적과 여러 가지 스팩을 자랑하며 배우자감을 찾는다. 물론 돈 많고 안정적인 지위나 직업을 가진 사람을 선호한다. 한 아주머니는 중국인 타임 기자를 보고 자신의 딸과 잘 어울리는 배우자라고 호감을 갖고 접근했다가 돈 많이 버는 직업과 거리가 먼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기자에게 “재산이 있느냐?”. “베이징에 등록이 된 주민인가?”를 묻고는 두 가지 이상 부정적인 답을 듣게 되자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런던대학교 글로벌 건강학과 테레스 헤스켓 교수는 중국 여성동료와 학생들이 “그 남자 정말 좋은데 너무 가난해서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곧잘 한다고 전했다. 중국은 2013년부터 혼인신고가 점점 줄고 있는 추세다. 이혼하는 부부도 2006년부터 매년 늘고 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늘어나는 중류층은 더 이상 결혼을 안정적인 삶을 위한 유일한 길로 여기지 않는다. 이제 전통적인 가정생활을 벗어나 사회경제적 활동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보다 3400만 더 많은 남성 심각한 성비불균형 중국에서 남성들은 선택권이 없다. 지금 중국의 인구는 남성이 여성보다 3400만 명이 더 많다. 가문의 대를 이을 상속자로서 남아선호사상에서 비롯된 결과다. 그래서 여아를 임신하면 낙태로 지우기도 다반사였다. 2020년 중국은 결혼 적령기 남성 2400만 명이 신부를 구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텍사스와 뉴욕, 미국의 2개 주 남성을 합한 수로서 이 엄청난 무리의 남자들이 영원히 고독하게 성적 만족을 누리지 못한 채 우울하게 살아간다고 상상해보라. 그 결과는 매우 비참할 것이다. 성비불균형은 소비감소, 부동산 거품, 폭력범죄의 만연, 결혼을 악용한 범죄, 마약밀매, 매춘 등의 폐해를 초래한다. 중국 정부의 고위직은 남성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교육현장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다. 일반 직장에서도 여성들의 비중은 높은 편이다. 심각한 성비 불균형 속에서 여학생에 대한 차별과 함께 남학생을 더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여대생 수가 더 많은 나라가 중국이다. 지금 중국 GDP의 41%가 여성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중이다. 중국 어머니들은 10명중 7명이 일을 한다. 세계적으로 자수성가한 여성 억만장자들 가운데 80%가 중국 출신이다. 중국 정부가 지금 펼치고 있는 두 자녀 갖기 정책은 오히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기업들이 육아에 보다 더 시간을 빼앗길 여성들의 고용을 꺼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의 고용관련 웹사이트 51job.com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기업들 중 4분의 3이 두 자녀 갖기 정책 때문에 여성들의 고용을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과거 한 자녀로 강력하게 통제했던 인구정책은 한 명의 손주로 하여금 조부모 4명, 부모 2명의 재산을 한꺼번에 상속할 수 있게 했다. 이른바 ‘4-2-1’ 현상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티야니의 부모 마잉과 류민웨이는 한 자녀를 가진 베이징 주민이면서 번창하고 있는 수도에서 6군데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자녀를 더 원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티야니에게만 이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재산 상속 문제로 싸우는 집도 많아요. 우리는 그런 추태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티야니 부모의 솔직한 심경이다. ■늙어가는 세계 ▶코도쿠시(Kodokushi): 일본에서 혼자 늙다가 고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1.76명: 미국의 출생률. 인구 성장세를 유지하려면 2,1명의 출산율이 필요하다. ▶1.16명: 싱가포르의 출산율: 싱가포르 정부는 젊은 부부들을 위해 필라테스(요가의 일종)반을 운영하고, 임신 촉진제로 음주를 권장한다. ▶28%: 일본에서 2050년 근로할 수 있는 연령층이 28%로 전망되고 있다. ▶20%: 미국은 2030년에 정년은퇴자들의 비중이 20%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사상 처음으로 어린이보다 더 많아질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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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㊻ – 키르기스스탄 ‘베르드벡 크즈 악사나‘[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누구나 외국에서 살면서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불편한 점을 느끼기도 하고 다양한 경험들 덕분에 어떻게 살지를 알게 되면서 적응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버린 순간도 된다. 눈깜짝하니 어느새 한국에 온지 8개월이 되었다. 선문대 어학원으로 오기 전 한국 문화, 한국어 등을 키르기스스탄 오쉬 세종학당에서 배우고 왔다. 친절하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한국어 실력이 더욱 더 늘어났다. 나는 한국에 와서 모든 것들을 경험해 볼 기회들이 많이 있으니까 다양한 경험들을 해봤다. 그 경험들은 내 인생에서 얼마나 즐겁고 어디를 가든지 그때 봤던 경험들을 기억속에 떠오른다. 고향에서는 한국분들은 엄청 다르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달랐다. 내가 항상 생각하는 한국사람들은 냉정하고 무뚝뚝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 이미지가 착하고 솔직하고 책임감이 있는 분들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낯선 한국 언니랑 만나게 되었는데 그 언니는 문화적 차이를 소개하며 나에게 한국을 더 알려주었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면서 그 언니의 성격이 밝고 친절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고 우리는 점점 친하게 되었다. 어느 날 만날 때 언니가 갑자기 선물을 주었다. 만난 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선물은 생활용품들이었다. 그 언니가 “어려운 것들이 있으면 부끄러워 하지말고 나한테 말해. 그럼 내가 도와줄게”라고 한 말이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깊이 남아 있다. 나는 우리의 만남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도와준 언니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9월 추석 때 서울에 계신 선생님 댁에서 추석을 보내고 천안으로 돌아오던 중 셔틀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교까지 버스로 가려고 했다. 버스에 앉은 후 버스를 잘못 탔다는 것을 모른채 갔는데 버스가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랑 같이 버스에 탄 낯선 언니한테 물어봤는데 그 언니도 어디에 가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버스기사한테 여쭤봤는데 그 아저씨는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고 우리는 무사히 버스에서 내렸다. 하지만 학교까지 가는 방법이 너무 복잡해서 그 낯선 언니는 친구를 불렀다. 우리는 낯선 언니의 친구가 올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기다렸다. 그 언니의 친구가 오고 내가 가려던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 사람들을 만날 때 길을 알려주는 경우는 있지만 집까지 데려다 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의 경험은 나에게 한국 사람이 ‘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시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나도 그렇게 익숙했다. 한국에 와서 급한 한국사람들을 보고 계획을 맞추고 시간에 엄청 신경을 쓰고 늦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요즘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지내고 있으며 어느새 적응이 되었다. 실제로 한국은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으며 발전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것들은 바로 노력이 끊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력이 없는 사람은 죽은 물고기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다. 나도 날마다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처럼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처럼 여러번 듣는 것보다 한번 경험해 보는 게 낫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한국을 그냥 선택하지 않았던 만큼 앞으로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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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㊺ – 일본 ‘송은현’[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나는 지난해 3월부터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아버지가 한국사람이고 어머니가 일본사람이며 5남매중 장녀로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일본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문화는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나라 한국의 문화는 많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의 문화를 알고 싶었고 한국 문화를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온 가장 큰 이유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습득해서 일본이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위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도 한국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공부하는 것과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한국어를 말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 한국어 실력이 일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이 늘었다. 그리고 한국어뿐만 아니라 문화도 배울 수 있어 한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많은 한국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사람의 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한국어와 문화를 점점 알게 되면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알게 되었다. 일본과 한국은 가깝고 먼 나라라고 하지만 지금 국제관계를 보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남북통일을 위해, 한국과 일본을 가까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싶다. 그리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를, 일본에서는 한국문화와 한민족에 대해 전하면 일찍 독도문제나 위안부문제 등을 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박물관이나 민속촌 등 역사적인 이 많은 한국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좋은 곳이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는 한국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로를 결정할 때 가족과 떠나서 사는 외로움과 모르는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두려움이 있어서 많이 고민했고 한국에 가는 것을 망설였다. 하지만 흔들리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을 밀어 준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에 오기전의 나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유학생활을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 유학을 통해 일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시야를 더 넓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힘든 일도 많이 있지만 그 이상으로 기쁜 일이 많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 편이기 때문에 외국사람하고 간단한 이야기 밖에 나눌 수 없었지만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에 와서 외국사람과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감동이자 기쁨이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한국어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공부해서 한국이란 나라를 더 알기 위해 또 한국과 일본을 가까운 나라라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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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㊹ - 타지키스탄 ‘아크말’[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나는 작년 2월에 타지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고 신기했다. 왜냐하면 날씨도 타지키스탄에 비해 춥고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조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웠다. 먼저 한국으로 유학간 친구들과 한국어로 많이 대화를 나누면서 항상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왔을 때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고 그 누구와도 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영어로 말을 걸었지만 내가 한국어를 하면 모두 놀라면서 “한국어를 정말 잘 하시네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나의 한국어 말하기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한국에 온 후에도 한국에 유학 온 친구들과 자주 만나며 타직어가 아닌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어 실력이 느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발표 할 때 교수님께서 “너는 대구 억양으로 마를 한다고 하셨다. 어떻게 경상도 억양으로 익숙해졌는지 의아해 하실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유학 온 친구들이 모두 대구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이 배운 경상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나에게 사용했고 친구들 말을 따라하면서 한국어를 연습했던터라 나도 모르게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때 교수님의 말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사실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친구들도 나에게 많은 경상도 사투리를 가르쳐 준다. 천안에도 있는 유명한 카페인 ‘마시그래이’가 있는데 대구에 사는 친구가 '마시그래이'가 경상도 사투리라고 했다. '마시세요'가 경상도 사투리로 '마시그래이'였고 '마시그래이'는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진 카페라고 들었다. 그때 느낀건데 한국어가 정말 귀여운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 중 경상도 사투리는 정말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생활에 어려움도 많이 있었다. 한국 돈은 타지키스탄의 돈보다 단위가 높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계산할 때 많이 헷갈리고 빨리 빨리 계산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과 함께 '다이소'에 간 적이 있다. 다이소는 항상 사람이 많고 다음 사람을 위해서 빨리 계산을 해야 한다. 그곳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고른 후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고 계산을 하게 됐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이만원이 넘는 돈이 나왔다. 난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한 후 계산원에게 오천원을 내밀었다. 그러자 계산원은 나를 계속 쳐다보며 있었다. 나는 “왜 계산을 안 해주지?”라고 생각했다. 계산원은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나는 바로 지갑에 있는 돈을 다 꺼내서 책상 위에 두고 “여기에서 받으세요”라고 했다. 정말 부끄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한국 돈 천원, 오천원, 만원, 오만원을 꺼내놓고 계산하는 연습을 했다. 지금은 다행히 한국 돈을 배웠다. 선문대에 다니면서 여러 나라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며 재미있게 학교도 다니고 새로운 친구도 만들고 같이 여러가지 경험을 했다. 예를 들어 바비큐 파티에서 학생들과 춤추고 고기도 먹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체육대회에서 여러 가지 한국 문화를 경험했고 달리기 할 때 일등을 했고 태권도도 경험하면서 노란색 띠와 빨간색 띠도 받았다. 또 너무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에 민속촌에 가서 한국의 옛날 모습과 한국 음식을 먹고 친구들과 한국 문화를 각자 나라의 문화와 비교하면서 여러 나라의 문화도 알게 되었다. 선문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너무 너무 친절한 교수님들과 교육이다. 교수님들이 너무 재미있고 학생들에게 자식들처럼 대해주시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집에 앉아서 삼촌과 공부하는 느낌이었고 너무 편했다. 이제 3개월 밖에 안 남았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니 아쉬운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을 바꿔 준 멋진 유학생활에 감사하며 이것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다같이 힘내서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해서 우리의 진로를 아름답게 만들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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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㊸ - 파나마 ‘카란자 마리아 페르난다’[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내가 한국에 온 것은 8개월 전이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예상대로 한국이 우리나라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고 느꼈다. 적응할 것이 많았고 문화적으로 차이점도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배웠던 것도 많고 유학함으로써 경험한 것 덕분에 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파나마에서 세상의 다른 쪽에 있는 한국에 오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말과 관련된 모든 것이다. 카드 발급이나 음식 주문까지도 평소에 해 왔던 작은 일이 어려워졌다. 특히 식당이나 은행에 갈 때 급한 직원들이 빨리 말하고 나를 대하기 힘들어서 짜증난 모습에 당황한 나는 불안했다. 그러한 사람들과 말하는 것에 대해 한국 생활을 피해버릴 만큼 싫고 무서워했다. 그때 한국인에 대해 차가운 인상을 가졌었지만, 내가 힘들어 하는 표정을 보고 도와줬던 그런 분도 만나게 되면서 한국인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지하철을 처음 탈 때 가려던 곳이나 내릴 역을 잘 몰랐었지만, 몇 번이나 어떤 분이 다가와서 도와준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한국생활을 하면서 점차 이런 급함에 익숙해지고 한국어 실력이 좋아지면서 처음에 어려워졌던 모든 일들이 다시 쉬워졌다. 또 다른 적응하기 힘든 것은 음식이다. 알다시피 한국 음식은 아주 매운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식을 맵게 만들지 않아서 갑자기 맵게 먹기 시작한다면 몸에 안 좋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먹게 되는데, 이런 생활에 완전히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 맵지 않은 한국음식을 찾아서 즐겨 먹고 익숙해졌을 때, 김치가 내 한국 생활의 기본이 되었다. 세상 곳곳에서는 나쁜 사람이나 친절한 사람을 모두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기대를 많이 하는 것보다 직접 가서 경험해 보면 진짜 한국을 알게 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아직 한국에 대해 접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한국생활을 만족한다. 나는 파나마에 계속 있는 것보다 이런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해서 너무 기쁘다. 한국에 와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새로운 외국어와 새로운 문화를 배울 기회가 되어서 아주 좋다. 오기로 할 때에는 왠지 충동적으로 결정했는데 그렇지 않고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더라면 아마도 지금 한국까지 오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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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㊷ - 우즈베키스탄 ‘이브라기머브 사둘라’[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 첫 번째 이야기: 초록 불이 들어와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길을 건너갈 수 없다. 어느새 한국에서 5년째 생활하고 있다. 믿기지가 않는다. 어제 한국에 온 것 같지만 그 어제는 2014년 2월 말이었다. 그때는 20대 초반이었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를 돌아보면 어떻게 될까? 한국 유학을 결심한 그때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원래 한국으로 유학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한국에? 세상은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지 말입니다. 이유가 뭐였을까? 우즈베키스탄 외고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어교육원을 5년이나 다닌 결과인가, 아니면 우즈베키스탄에서 삼수를 실패하고 얻은 교훈 때문인가? 확실한 이유 중에 하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시험에 떨어졌을 때 한국어 공부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고등학교에서 3년이나 배운 외국어가 한국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배웠는데 물거품이 되면 아깝지 않은가! 그 당시 한국문화와 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웠고 한국어로 말할 때마다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2013년도 초 6번째 본 한국어능력시험 결과 4급... 두 번이나 0.5이 모자라 3급을 못 땄는데 이번에 4급을 통과했다. 이것은 한국 유학을 위한 첫 단계였다. 그 이후에는 한국 정부에서 외국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지원하게 됐다. 운이 좋게 합격하고 공식적으로 유학생의 타이틀을 얻었다. 그런데 5년이나 타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게 처음에 좀 두려웠다. 한국에 아는 지인도 없고, 한국어도 잘 못 하는데 거기서 5년이나 학교를 다니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이 기회는 내 마음 속 대학생에 대한 한을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의 순간이 왔고 과감하게 첫걸음을 옮겼다. 초록 불이 들어와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길을 건너갈 수 없다는 말처럼... # 두 번째 이야기: 첫날부터 장난이 아니네!!! 난 누구 여기 어디?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날...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겨울. 2014년 2월 인천공항에 도착한 날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첫날에 대해 생각하며 기대했다. 첫날에 뭐 할까? 새로운 친구들 사귈 수 있을까?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맞는가? 참고로 그날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서울로 가지 않고 바로 천안으로 향해야 하는 것을 까먹을 뻔했네! 맞다. 나의 한국 고향은 천안이다. 선문대에서 일 년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다시 첫날로 돌아가서... 인천공항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천안으로 이동했다. 키르기스스탄과 네팔 친구, 천안으로 가는 길에 아무도 말 한마디 안 했다. 진짜 어색했다. 게다가 난 7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뭐라고 말할 힘도 없었다. 먼저 온 네팔 친구는 같이 가는 사람이 없어서 14시간 동안 우리를 공항에서 기다렸으니까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건 나중에 그 친구가 이야기해 줬다~ㅋ) 이런 어색함을 실은 콜밴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선문대 아산 캠퍼스 기숙사에 들어갔다. 짐을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새로운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터키, 예멘, 이집트,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탄자니아. 각양각색의 친구들이었다. 같이 다니는 것도 신기하고 하는 말도 신기하고, 그때까지 영어가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다들 서로 이야기하는데 영어로 통했다. 태어나서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했을까? 그냥 웃으면서 몸짓으로 넘겼지. 영어는 이해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왜? 자신감이 없었다. 이집트 친구가 계속 대화하려고 말하는데 얼굴에 미소를 짓고 듣기만 했다. 근데 질문이 나왔다. "How do you think about it?" 이해했는데 말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잘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뿐. 그래서 그냥 "I don't know English"이라고 대답했다. 나한테 열심히 자기 이야기를 한 이집트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긴 상황이었다. (나중에 이집트 친구가 그때 내 대답을 듣고 이 사람과 다시 말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나의 절친이 됐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ㅋㅋ) 영어는 두려웠지만 한국말에 대한 공포증은 없었다. 그 친구들과 한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주문할 때 30분이 걸렸다. 내가 잘 안 되는 영어로 메뉴를 설명했고 한 명씩 물어보니까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사람이 많고 입맛도 달라서 메뉴 선택은 쉽지 않았다. 앞으로 이렇게 여러 명이 같이 밥 먹으러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잘 안 되는 영어와 통역을 하는 것도 어렵고 첫날은 기대한 것과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이런 글로벌한 생활은 낯설어서 그런가? 그렇지만 앞으로 선문대 어학원을 다니는 게 기대되기도 했다. 이런 재미있는 친구들과 함께 어떤 모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 세 번째 이야기: 나는 회장(President)이다! 한국에 와서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회장이 되었다. 친구들이 나를 ‘Presiden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좀 있어 보이지 않아? 뭔가 큰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원래 작은 사람은 아니지만 ㅋㅋ) 사실은 한국에 와서 어떤 회사의 회장이 된 것이 아니고 한국 정부초정 장학생들의 회장이 된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필리핀부터 멕시코까지 30개 나라에서 온 43명의 외국인 학생이었다. 우리 외국인 친구들과 처음 만나고 식당에 갔을 때 도와준 것이 인상 깊었나 보다. 회장을 선출하는 자리에 내 이름이 나왔고 얼떨결에 이런 직책을 얻게 되었다. 한국말을 좀 하는 편이라서 그렇게 된 것인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네. 그러나 그때 이 자리가 호락호락한 자리 아닌지 몰랐다. 그 후로 친구들은 나를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원자로 보기 시작했다. 매달 생활비가 안 들어오면 나한테 물어보고, 행정실과 어떤 문제가 있어도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아졌다. 인기가 많다고요? 맞는 이야기지만 우리 외국인 친구들이 본인한테 문제가 생길 때만 회장을 찾아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뿐만 아니라 신기하게 회장이 되고 나서 제일 많이 간 곳이 병원이었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라서 병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쉽게 아프고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때 친구들을 데리고 병원 가는 게 내 몫이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을 아픈 외국인 친구한테 영어로 통역해 줘야 했는데... 젠장,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들을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영어도 못 하는 놈이.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실수한 적도 있었지만... 한 번은 파키스탄 친구가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같이 갔다. 의사 선생님이 그 친구를 보고 나서 처방을 해주셨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당부한 것이 "이 약을 먹으면 졸리니까 먹을 때 조심하세요."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친구한테 이 말을 설명하는 것을 까먹었다. 사흘 만에 그 친구를 만났는데 아침에 의사 선생님이 주신 약을 먹고 계속 잠이 와서 수업에 못 갔다고 한다. " 왜 그렇게 됐지? 혹시 의사가 줬던 그 약에 뭔가 있는 게 아닐까?" 친구가 이렇게 묻자 갑자기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친구한테 의사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을 알려줬는데 그 친구는 "왜 이제 이야기하는 거야? 너 때문에 삼일 동안 수업에 못 갔잖아"라고 했다. 그때부터 친구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면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다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1년 동안 43명의 외국인 유학생의 회장 역할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이 친구들 덕분에 내 리더십, 인간관계, 배려심 같은 발굴되지 않은 면을 발견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우리 가족의 그리움을 치유하는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유학 생활 동반자가 되었다. # 네 번째 이야기: 뭉쳐야 산다(생일파티) 선문대 어학원 수업 첫날, 아침 9시 수업 가는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 우리 외국인 학생들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옷차림도 다르며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하는 모습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수업 끝나고 점심 먹으러 갔는데 다 같이 메뉴 고르는데 좀 거짓말 보태서 거의 한 시간 걸렸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이 한국 음식을 알 리가 없지. 그런데 다 같이 다니니까 좀 있어보였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 곳에 모였는데 어떻게 빨리 친해질 수 있을까? 이것은 내 첫 고민이었다. 어떻게 할까? 친구들은 다 다양한 문화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언어도 다르다. 서로 친해지기 쉽지 않겠다. 그런데 굳이 왜 내가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하나 의문이 들기도 했다. 뭔가 개인적으로 우리 학생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때 우리를 담당하는 선생님께서 나에게 우리 학생들의 명단을 주셨다. (우리 학생들 회장이니까 명단이 있어야지) 명단을 살펴봤더니 다음 날이 필리핀 학생의 생일이었다. 그순간 이 학생 생일파티를 하며 축하해주면 기쁘겠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계획을 짰다. 생일파티를 위해서 적어도 케이크와 음료, 과자 등 있어야지. 그런데 돈이 있어야 그런 것을 살 수 있는데... 아아, 우리 외국인 학생들한테 2천 원씩 걷어야겠다. 당연히 생일인 필리핀 친구 몰래 해야지. 다음 날 아침에 수업 가기 전에 몇 명 친구한테 내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는데 그들도 동의했다. 먼저 온 친구들에게 2천 원을 받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다른 친구들한테도 돈을 받았다. 다는 아니고 케이크와 음료를 살 수 있는 돈을 모았다. 이 돈으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필요한 것을 다 사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준비하며 여자 기숙사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도 부르고 필리핀 친구를 기다렸다. 그러나 친구는 오지 않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친구가 다른 친구 세 명과 같이 서울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일파티 준비를 마쳤는데 주인공이 없고 첫 생일파티가 허무하게 끝날 위기를 맞았다. 결국에는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것들이 헛된 일인가 생각했을 때 밤 12시 전에 필리핀 친구가 학교에 도착했다. "생일인데 왜 서울로 가냐고" 약간 화를 냈는데 "내 생일을 알고 이렇게까지 준비할지 몰랐지"라는 대답을 들었다. 친구 말이 맞긴 하다. 허겁지겁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여자들이 기숙사 통금 시간 때문에 빨리 들어가려고 달려갔다. 우리가 남은 케이크를 먹고 방으로 갔다. 나름 성공적이었던 첫 생일파티를 마치고 뿌듯했다. 그리고 다음 생일파티를 할 때 더 신중하게 계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 더 우리가 거의 40번이나 생일파티를 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 외국인 친구들과 빨리 친해졌다. 생일파티하면서 친구 얼굴에 크림을 묻히고 엄청 웃고 등등... 그땐 정말 행복했다. 어학원 생활은 너무나 이런 추억들로 가득 찼다. (어학원 생활을 마치고 대학교에 갔을 때 이런 일들이 훨씬 줄어들 줄 몰랐다.) 사실은 생일파티 할 때마다 돈을 모아 케이크 사오는 게 좀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았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일축하 노래를 듣고 케이크를 잘라서 나눠 먹을 때 울컥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나한테 열정의 원천이 되었다. 타지에 와서 옆에 가족도 없어서 외로울 텐데 우리의 작은 관심이 그 친구한테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깨달았다. 외국에서 오래 살면 옆에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중요하고 행복한 일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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